시간의 저 편으로



어린 시절, 계림문고나 계몽사 문고 못지 않게 접한 동화책은 소년생활 칼라북스였다. 계몽사문고는 주로 부모님이 사준 전집이나 혹은 이동도서관, 학교 학급문고로 접했던 데 비해 칼라북스는, 용돈을 모아서 보고 싶은 것이라든지 끌리는 제목을 선택해서 한권 한권 사들이는 그런 책이었다. 사실 더 갖고 싶었던 것은 솔직히 클로버 문고의 만화들이었지만, 우리 세대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그건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별 불만은 없었다. 정기적인 용돈을 받기 전이었고, 시험 성적이 좋다거나 하는 효도(?)를 했을 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항이었으며 부모님도 기꺼워 하셨었다.

소년생활 칼라북스,,, 클로버 문고나 계몽사 문고 못지 않은 추억을 준 책이었다. 전체 몇 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한 100권 됐나?) 색깔별로 카테고리를 구분했었던 것 같다. 골드 시리즈에 속하는 책들로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기억나고(나는 아마 이 때부터 뒤마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독자였다), 블루 시리즈엔 주로 추리나 SF 쪽을 다루었었던 것 같은데 호움즈라든지 도일의 또다른 작품, 잃어버린 세계 등이 있었다. 그리고 오렌지, 그린 시리즈 등등이 있었고 아마 그 당시 가장 많이 접한 카테고리는 레드에 속하는 우리 고전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땐가, 이벤트가 있었다. 열권을 한꺼번에 구입하면 비닐로 된 책 케이스를 주었고 무슨 경품 응모권이 들어있는... 요즘 경품에 비하면 정말 코웃음 거리도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열권이 한꺼번에 들어있는 비닐 케이스를 품에 안고는 한없이 행복했었던 그 기분이 생각난다. 순진한(?) 나는 번호 순서대로 주욱 10권을 구입해야 하는 줄 알았었는데 골라서 10권을 채워도 된다는 문방구 주인 아저씨의 말씀이 어찌나 고마웠는지~! 그 때 골랐던 책들이 오성과 한음, 임꺽정,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였던가? 박수동님 만화로 신판 오성과 한음을 먼저 읽었던 나는 그 책을 통해 오리지널 이항복과 이덕형을 알게 되었고, 후일 읽고 읽고 또 읽었던 홍명희 선생님의 임꺽정을 접하기 훨씬 전에 임꺽정이란 이름을 처음 접했었다(가장 최근(?)에 이두호님의 만화 임꺽정도 물론 섭렵했다).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교학사에서 나온 만화 한국의 역사에서 살짝 접했던 초기 삼국시대의 로맨스... (TBC에서 나름 새롭게 재해석된 낙랑공주가 출연하는 인형극을 보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 호동 왕자를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바람의 나라'란 만화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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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작품이다. 미완결인 작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언급을 해오진 않았지만, 이 만화는 내게 어쩌면 또다른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만화가 되었기에 잠시 짚고 넘어가 본다. 바람의 나라... 대단한 작품이다. 뮤지컬로도 만들어졌고 얼마전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태왕사신기가 표절을 했느니 어쨌느니... 그 진위 여부야 더 전문가들이 알겠지만 대단한 파장을 불러 일으킨 작품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온 만화. 아마 어릴 때 만화를 좋아하던 꼬마였다면, 그 애정이 사춘기를 지나서도 지속되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만화가의 꿈을 꾸지 않았었을까? 나도 그 중 하나였다고나 할까... 전혀 상관없는 길을 가면서, 전혀 엉뚱한 공부를 하면서도 내 의식의 어느 한 편을 꽤 오랜 시간 차지해 왔던 그 희미한 꿈의 끝자락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칼에 깨끗하게 베어진 것이다. 아픔도 없고 망설임도 없고 그야말로 일도양단, 나는 해방감마저 느꼈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만화작가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의 상상력은 가져야 하지 않나?"

그렇고말고요... 나는 강하게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 순도 100%의 독자가 되었다.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그 작품이 바람의 나라였다.

신생국가 고구려, 황조가란 연가를 읊었던 유리왕은 늙었고, 주인공은 후일의 대무신왕인 무휼 왕자, 주변국과의 복잡한 관계, 정략결혼 등등의 사건에... 인물들은 신수(神獸)들과 얽혀있고... 이렇게 역사와 판타지가 어우러져 스토리는 단순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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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등장 인물들은 다 생략하고 눈길을 끌었던 이름을 가진 인물을 살펴본다. 바로 '괴유'다. 이 이름은 예의 그 소년생활 칼라북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서 처음 접했던 이름. 바람의 나라에서도 아주 꽃미남(?)으로 등장을 해 주신다. 실존인물이란다. 드라마 주몽에서 그렇게 미움을 받던 악역 대소에게 최후를 선사한 인물. 그렇다. 대소는 (욕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주몽과 그 아들인 유리의 시대를 넘어 대무신왕 대에까지 장수한 셈이 된다.


괴유 [怪由, ?~22] : 북명(北溟) 출생. 《삼국사기》에 의하면 9척 장신에 얼굴은 희고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고 한다. 대무신왕이 친히 부여를 정벌하려고 출정하는데, 종군할 것을 자원하여 22년 2월 부여 남쪽에서 벌어진 쌍무에서 진흙에 빠져 진퇴가 자유롭지 못한 부여왕 대소(帶素)의 목을 베었다. 그가 발병하여 병이 심하자 왕이 몸소 문병하였고, 22년 10월 죽자 북명산 남쪽에 장사하게 하고 때를 따라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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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는 아직 완결은 나지 않은 상태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여리디 여린 호동왕자, 일반적이지 않은 파격적인 설정의 자명고다. 그러나... 완결이 되기 전엔 다시 보지 않으리라 작심했다. 아마 보게 되면 1권 첫장부터 다시 훑어야 되리라... 참, 아들 호동이 그렇게 성장해 가는데도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 듯 보이는 무휼은 좀 어색하다. 주인공의 젊고 잘 생긴 외모를 망가뜨리는(?) 것은 작가로서도 달갑지 않은 일일 터이다. ㅎㅎㅎ



 

현대의 고고학도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모래폭풍에 휩쓸린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은...

김혜린님의 단편 '로프누르, 잃어버린 호수'의 도입부다. 고고학도 박진우는 그렇게 1500년 전, 당에게 멸망당해 핍박받고 있는 누란에서 기구한 운명을 바라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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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사산(鳴沙山) 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백이십년(百二十年). 호(胡)의 한 부족(部族)이 그 곳에 호(戶) 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구(口)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 이천 구백 이십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
[김춘수님의 명사산]

단편(?)에서도 김혜린님의 작품세계는 일관성을 보인다. 짓밟히는 약자, 냉혹한 권력자, 주인공은 여전히 고생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흑기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이 간직한 작은 소망의 불씨는 꺼뜨리지 못한다. 고고학도 진우는 그렇게, 역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갔을 이름없는 사람들의 슬픈 삶의 모습을 옆에서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의 꿈인듯 싶게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그...

결론은, 이 작가는 역시! 라는 거지.





순정만화라, 작가는 대부분 여성이겠지? 그림체는? 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가늘고 여리여리한 선.

그러나 그렇게 단정을 지어버린다면... 이 작품을 언급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 모든 고정관념(?)을 확 깨버리는 작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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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쭉쭉빵빵 섹시(!)한 팔등신 미녀가 등장해 주시는 순정 시대 만화. 바로 '살례탑'이다. 현대의 고독한 문제 소년 김문빈이 그야말로 귀신의 조화(!)로 770년 전의 고려시대로 빨려들어가 다른 사람 몸에 빙의 된다. 때는 바야흐로 몽고의 고려 침입이 있기 바로 전, 빙의된 몸은 고려의 유명 장수 김경손의 아들이다.

그건 좋은데, 살례탑(撒禮塔)이 도대체 뭐야? 저런 해괴한 탑이름이 있었나? 그 의문이 풀린 것은 만화의 배경이 몽고로 넘어가고 나서다. 몽고의 고려정벌대 대장의 이름 살리타이, 그 때 모든 퍼즐이 타다닥, 제자리를 찾았다. 어렸을 때 읽어 뇌 깊은 곳에 박힌 탓에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그림들(그래서 아마 치매에 걸려도 그 부분은 기억날 터이다 ㅋㅋ), 12권짜리 만화 한국의 역사 5권쯤에 등장하던 그 장면...

고려 시대, 몽고의 발굽에 짓밟히는 고려, 처인성(지금의 용인이란 것도 기억났다)에서 열심히 활연습을 하는 어떤 스님, 그의 대사는 "이놈 살리타이야, 내 화살을 받아라!"라는 것이었다. 기억에 의하면 그 스님 김윤후의 활에 결국 목숨을 잃는 몽고의 장수 이름이 살리타이었다. 살리타이를 한문으로 쓰면 撒禮塔이 되는 것이고 살례탑이라 읽히며 그것이 바로 만화의 제목이 된 것이었다.

어? 주인공 이름은 김문빈이고 빙의된 소년의 이름은 김사겸인데...?

아무튼 예사롭지 않은 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시추에이션을 만난 소년은 또한 주인공다운 시간을 보내게 되며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된다.(어쩔 수 없잖아, 작가가 하라면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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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후기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한 역사적 인물 김경손 장군에 대해서 언급했다. 물론 작가의 재량으로 그의 최후는 좀 다르게 설정했지만.

당연히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의 지휘자인 살리타이가 등장하고, 징기즈칸의 두 아들, 징기즈칸의 뒤를 이어 대칸이 되는 오고타이와 그 형인 차가타이가 나오며 고려측의 실존인물로서는... 위의 김경손 장군, 박서 장군, 승려 김윤후, 후에 삼별초의 대장이 되는 배중손이 잠깐 등장한다.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조금은 낯선 그림체 덕에 선뜻 손이 가진 않았던 작품이었는데 한 번 읽기 시작하니까 몰입이 수월했다. 그만큼 전개의 스피드도, 스토리도, 빠지면 안되는 로맨스도,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까지도 만족스러웠단 뜻이 된다. 그리고 역사와 픽션의 버무림도, 그 비율도 나의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 되겠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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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는 잘 모른다. 따로 열심히 공부한 적도 없다. 순정만화의 눈높이에서 다루어진 만화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바람의 검심을 비롯한 몇몇 만화에 메이지 시대의 신선조가 나오긴 하지만 워낙 공부와는 담쌓은 시절 이후에 접한 만화들이라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할 능력이 못된다. 요시츠네란 인물은 일본에서도 꽤나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인 듯 싶은게 이 사람을 다룬 만화도 꽤 되는 것 같다. 괴기 판타지 시대물 쯤 되는 작품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제목은 잊었다). 아무튼 지금 연재 중인 '차나왕 요시츠네'를 재미있게 읽는 중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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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장편, 드라마로 치자면 '대하'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아깝지 않은 만화도 있다. 용(龍)이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36권까지 나왔나? 20세기 초의 일본과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끝이 나지 않은 재미있는 만화를 보는건 꼭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삼국지/초한지/열국지/서유기 등등을 흥미롭게 각색하신 고우영님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허영만님, 이두호님 등도 시대만화의 대가이시지만 순정만화 장르로 넣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핑계 김에 그냥 접는다. 순정만화 못지 않게 좋아하는 만화 분야라는 것은 필요는 없겠지만 굳이 밝히고 넘어가야겠다. ㅎㅎㅎㅎ




아무튼, 멋도 모르고 시작한 나름대로의 연재 '까칠하게 만화읽기'는 이렇게 끝내기로 한다. 머리속에서 맴도는 것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는 그 행위 자체에 의의를 둔다면 그렇게 불만스러운 건 아니다. 끝으로, 꼭,꼭,꼭, 해보고 싶었던 한 마디를 여기에 써보자.


그가 이 단어를 쓰는데 몹시 부러웠거든.


The End?  Oh, No!!

FIN? 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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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 바로 이거.


Q.E.D.
(quod erat demonstrandum duitama)


증명 뒷담화 종료.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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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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